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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큰 별' 김영삼 前 대통령, 역사에 잠들다

  • 이동수 기자
  • 입력 2015.11.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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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문민정부 대통령··· 부정부패 척결에 큰 업적"
(오픈뉴스,opennews)

현대사의 ‘큰 별’이자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인의 명복을 빌고 애도하는 온 국민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화투쟁의 최전선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의 삶은 말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최연소(26세) 국회의원, 9선 국회의원, 3번의 야당 총수. 결국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은 32년간의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뒤 군부사조직인 하나회를 청산하고 금융·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 정치를 펼치는 등 국가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편집자주>
 
김영삼 대통령 영정1.jpg▲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마련된 故 김영삼 前 대통령의 영정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을 지낸 거산(巨山) 김영삼 前 대통령(YS)이 22일 새벽 0시22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했다가 상태가 악화됐고,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패혈증과 급성신부전으로 서거했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공식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밝혔다. 박 대통령은 또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 뜻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면서 “유가족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AP통신, 중국 신화, 일본 교도 통신 등 주요 외신들도 “군사독재에 맞선 첫 ‘문민정부’ 대통령” “금융실명제 등 과감한 개혁 이룬 인물” 등으로 YS 서거 소식을 긴급 보도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오는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된다. 장지는 서울현충원이다. 국가장 절차에 따라 정부는 빈소를 설치·운영하며 운구, 영결식, 안장식을 주관한다.
 
 
최연소·최다선 국회의원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4일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여놓고 대통령의 꿈을 키운김 전 대통령은 1951년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경남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나섰다. 그는 26세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이후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모두 9차례 당선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함께 최다선 기록도 갖고 있다.
 
“민주화 역사 만든 큰 별”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후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사사오입)이 단행되자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 험난한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 전대통령은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타고 있던 승용차 창문에 괴한들이 초산을 뿌리는 테러를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뒤 제1야당 당수로서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철회를 요구했고 이는 의원직 제명 발단이 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9월 김영삼 의원 제명 방침을 정하고 집권 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강행 처리로 의원직을 잃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을 제명 당하면서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했고 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성명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을 담은 시대적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영원한 라이벌’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두사람은 민주화 투쟁 때는 한마음으로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권력을 앞에 두고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맞수’였다.
 
지난 1985년 양김 씨가 힘을 합쳐 만든 신민당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1987년 대선은 둘이 각자 대선에 나서 1노3김의 구도가 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귀결됐다.
 
“최초의 문민정부 연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은 1988년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에도 밀려 원내 3당의 지위로 떨어지는 등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이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소위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아래 3당 합당을 결행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이 하나로 합당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이후 군부정권 세력에 견제를 당했지만 위기를 돌파해 끝내 1992년 5월 민주자유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드디어 1992년 14대 대선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결을 펼쳤고, 득표율 42%로 당선됐다.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등 부패척결“
 
지난 32년 간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김 전 대통령은 하나회(육군사관학교 출신 인사들의 사조직)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공직자 재산공개 등 과감한 개혁으로 한국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지도자였다.
 
문민정부의 국정기조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부패척결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 마자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의 뿌리를 뽑았다. 특히 과거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되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직접 지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시킨 것 이 대표적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금융·부동산의 양대 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제도 등 부정부패 청산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도입,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였다.
 
김 전 대통령은 또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 뽑기,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같은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아울러 우리나라가 ‘ICT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보통신부’를 만들었고, 정통부 주도로 무궁화 1호 위성 발사,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 등도 그의 임기 중에 이뤄졌다.
 
김 대통령의 또 다른 업적은 1995년 민선 지방자치제 실시로 중앙집권적 정부권한을 지자체로 상당부분 이임하는 등 권력 분점에도 집중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집권 후반 불거진 부패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지고, 무리한 개방과 경제정책으로 실패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7년 1월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대우그룹과 기아자동차의 도산 사태는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가게 된다.
 
한편,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진행된다. 안장식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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